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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이 처음 이뤄졌을 때는 방 7개짜리 건물이었다. 세종 때 절의 공간이 부족하여 세종은 정전의 바로 서쪽에 영녕전을 세웠다. 영녕전은 조묘(趙 descendants)라고도 불렸는데, 조묘(趙 ancestors)는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평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며, 절에서 이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16칸으로 구성된 영녕전은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신영토 34위다. 그러나 검은 기와와 붉은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월대와 하월대가 있어 정전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지붕이 다르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당의 전체 지붕이 곧은 반면, 영녕전은 중앙 태실이 높은 곳에 있다.


태조의 증조부와 그 부모의 위패가 담긴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영녕전은 정전보다 작고 편안하다. 영녕전에는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거나 재위 기간이 짧은 왕의 신들이 모셔져 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뒤 숙부에게 빼앗긴 단종의 조상은 종묘에 모셔졌으나, 왕위 계승자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전은 물론 영녕전에도 조상이 없었다. 유교에서 중시하던 조상의 존경을 실천하지 않은 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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