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 처음 이뤄졌을 때는 방 7개짜리 건물이었다. 세종 때 절의 공간이 부족하여 세종은 정전의 바로 서쪽에 영녕전을 세웠다. 영녕전은 조묘(趙 descendants)라고도 불렸는데, 조묘(趙 ancestors)는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평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며, 절에서 이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16칸으로 구성된 영녕전은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신영토 34위다. 그러나 검은 기와와 붉은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월대와 하월대가 있어 정전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지붕이 다르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당의 전체 지붕이 곧은 반면, 영녕전은 중앙 태실이 높은 곳에 있다. 태조의 증조부와 그 부모의 위패가 담긴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영녕전은 정전보다 작고 편안하다. 영녕전에는 뚜..
정전은 옆으로 길게 뻗은 1층 건물이다. 검은 지붕과 붉은 기둥이 늘어서 있어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간결하고 간결하다. 무심코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어느 건물보다 흥미로운 점이 많다. 정전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화려한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궁궐이나 유명한 옛 건물에서는 화려한 단청은 고사하고 흔한 조각품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장식은 모두 동서양의 지붕에 있는 악령을 보호하는 것이다. 정전은 제사를 지내기에 신성한 곳이라 간결하고 옷차림이 없었다. 정전을 받치고 있는 20개의 기둥을 자세히 보면 모두 같은 모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연장하는 과정에서 정전 형태가 바뀌었고, 건물의 안정성과 시각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에 들어서면 왕과 왕비들이 다녀간 험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서 절의 상징인 정묘 입구로 이어진다. 남문을 지나 정전에 이르면 웅장한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가로 109m, 세로 69m의 넓은 담벼락에 세워진 정전은 웅장한 건물이다. 가로 101m로 국내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이다. 깜깜한 건물 앞에는 '월대'라는 가느다란 돌대가 있다. 정전의 위엄을 발휘하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만들어졌다. 하단에는 하월대, 상단에는 상월대 등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의 마당인 월대를 이루는 돌은 매우 거칠고 땅은 평평하지 않다. 바닥에 거친 돌을 사용하는 것은 경박한 지상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것으로, 지면의 경사가 평평하지 않아 폭우로부터 자연스레 벗어날 ..
종묘는 조선시대 500년 이상 제례의 전통이 지속되는 곳이다. 종묘에서는 과거 왕조의 제사를 종묘제례라고 부른다. 종묘대제라고도 하는데, 조선왕조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의식이다. 조선 시대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설날 등 1년에 다섯 번 제사를 지냈다. 또 나라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면 임시로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작물이나 과일이 생산되는 시기에 하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종묘제례는 모든 행사의 순서에 따라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것이 동반되었다. 종묘제례악에서 행해지는 음악과 춤을 종묘제례악이라고 한다.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악과 어울리는 위엄이 특징이다. 한국 가요계의..
고려를 격파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운 조선의 시조 이성계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1394년 한양(漢陽)을 수도로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종묘를 지었다. 종묘의 건립은 1394년 10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다. 종묘에서는 조상의 영혼을 모신 건물이 정전이었다. 오늘의 정전은 태실 19칸과 절의 양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 지어졌을 때 정전은 총 7베이밖에 되지 않았다. 비록 오늘날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종묘전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주기 위해 지어졌다. 죽은 조상의 넋을 기리는 장소로서 고인의 색채와 장식을 최대한 절제했다. 대신 소박하고 엄숙해서 엄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정전에 태조 이조 도조 환조 등 4대 조상이 모셔져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전은 신주..
조선은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거로 삼았던 왕조였다. 유교는 조상 숭배, 예의, 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유교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육체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상징물을 만들고 보관하였다. 그 상징은 신주라고 불린다. 유교는 우리 조상들의 삶에 깊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조상들의 정신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조상들은 고인의 영혼이 머물 수 있는 장소와 육체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유교에서 사당은 영혼이 머무는 곳이고, 무덤은 육신이 머무는 곳이며, 종묘는 왕과 왕비의 영혼을 모시는 특별한 사당이었다.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
조선 왕조는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유교적 예법에 따르면 수도권의 공간은 3개여야 한다. 세 곳은 임금이 머무는 왕궁과 종묘,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말한다. 이에 따라 조선이 세워질 때 가장 먼저 종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선시대 유교 전통인 왕실의례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종묘는 또한 장엄하기로도 알려져 있다. 장엄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정전과 영녕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자연스레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종묘도 세계문화유산이지만 종묘에서 열리는 종묘제례와 제례악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지키고 지켜야 할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고려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차이직지심극으로 인쇄된 고려의 금속활자는 왁스(보통 초의 주성분으로 단단하지만 열을 가하면 쉽게 녹는 물질)에 글자를 새긴 다음 깁스 점토로 싸서 왁스를 녹인다. 밀랍이 녹아 주물토에 글자 모양의 공간을 만든다. 물에 금속을 붓고 나면 주물토양을 제거해 인쇄공정을 완료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인쇄를 이용해서 다양한 책을 인쇄할 수 없다는 데 있는데, 왜 그럴까? 기존 금형을 재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을 만들 때마다 활자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기존 타입을 재사용해도 소량일 뿐이다. 한자를 한꺼번에 금속활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런 단점이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였다. 반면 서양에서 처음 나온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인..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인쇄 강국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의 광대함은 세계인의 감탄을 받고 있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것은 15세기 중엽이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선 14세기에 한국은 이미 금속활자로 된 책을 인쇄했다. 아쉽게도 한국 최초의 금속활자 자본이 아직 전달되지 않았다. 고려 후기 작가 이규보가 쓴 『동국상국집』에는 『상상정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아, 안됐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고 책을 인쇄한 나라였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기 직직지침체.나는 활이 있다..
2020년 9월 25일 butistar 블로그 새롭게 개편합니다.